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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큰스님

  • 백학명(白鶴鳴) 선사
  • 박한영 스님
  • 매곡 (梅谷) 선사

인백학명(白鶴鳴) 선사

백학명선사는 내장사에 오래 머물렀던 선법에 통달한 법사이며 고승이다. 성이 백씨요(白氏), 법명은 계종(啓宗)이며 법호가 학명(鶴鳴)이었다. 1867년 전남 영광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비범하고 총명한 기운이 뛰어나 장래 큰 인물이 될 사람이라고 주위 사람들은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불행이도 집안이 가난했다. 너무 빈한하여 학업을 지속할 형편이 못되었다. 마침내 자신이 필상을 하여 부모님과 두 동생의 생계를 꾸려가는 어려움속에 살아갔다. 이러한 난관 속에서도 선사는 환경에 굴하지 않고 공부만은 전력을 다했다. 대성(大成)의 길은 학문이 앞서는 길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나이 20세의 소년이 되었을 때는 부모님이 이미 돌아가신 후였다. 부모를 잃은 선사의 가슴엔 항상 공허했고 인생무상을 절감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그는 순창 구암사와 인연을 맺게된다. 그때 구암사에는 유명한 고승 설두(雪竇)화상이 머물고 있었다. 그는 설두화상의 설법을 듣고 크게 감명을 받은 후 스님이 될 것을 결심하고 출가하고 말았다. 그후 학명선사는 고향에 돌아와 잠시 머물면서 높은 뜻을 더욱 공고히 굳힌 후 불갑사에 들어갔다. 불갑사에 들어온 그는 즉시 금화화상의 상좌가 되었다. 그의 험준한 고행의 길이 시작된 것이었다. 상좌로서 해야할 많은 일들을 조금도 흩어짐없이 해나가면서도 누구도 감히 따를 수 없는 굳건한 정신으로 불도 정진에 몸을 바치고 있었다.

이어서 벽송사, 선암사, 송광사 등에서 끊임없이 수도에 전념하였다. 나이 34세 되던 해에 구암사 금화화상의 뒤를 이어 불교강사직을 맡아 보기도 했다. 이러한 수행의 고행 과정에서 곧 참선의 깊은 경지에 들어 큰 도를 깨닫게 된다.

1914년 봄에는 홀연히 중국과 일본의 유명한 사찰을 돌아보며 그곳의 고승들과 만나 불서를 놓고 고답적인 고담을 펴기도 했다. 그후 귀국하여 부안 변산에 있는 내소사와 월명암의 주지로 있으면서 참선의 깊이를 다져 선풍을 일으키고 강론을 계속했다.

1923년의 이었다. 백양사에 머물던 송만암선사 한테서 연락이 왔다. 내장사의 주지가 되어 달라는 부탁의 내용이었다. 당시 내장사(現 碧蓮庵)는 절의 운영부실로 인하여 퇴폐의 위험을 안고 있을 때었다. 그는 송만암선사의 간곡한 권고를 물리치지 못하고 내장사의 주지가 되었다. 내장사의 중책을 맡은 그는 즉각 극락보전을 중건하고 선원을 새로 지었으며 사찰 주위에 흩어져 있는 부도를 지금의 부도전으로 옮기고 각종 수목을 심고 정비하는 등 불사에 크게 힘썼으니 내장사 일대 중흥에 박차를 가함은 물론, 드문 공적을 쌓았다. 그후에도 불사와 수도를 병행하면서 수도하는 가운데 불자들을 교화하였다.

내장사에 있는 동안 젊은 신도들을 모아 불도 수련과 교리의 전도에 전력했다. 그때 백학명선사는 제자들과 불자들에게 반선반농(半禪半農)의 사상을 가르쳤다. 스님된 사람이 놀고만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손수 농사를 지어 보아 그 고통까지도 체험하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내장사 주변의 넓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작물을 제자들과 직접 심고 가꾸었으니 자호(自號)를 백농(白農)이라 했다.

백학명 선사의 용모는 꼭 달마상을 닮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달마상 그리기를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학덕이 놓고 선의 깊은 도를 깨친 살아있는 부처라 하여 생불이라 불리기도 했다.

선사가 돌아가기 몇달 전부터 내장사에는 신기한 일들이 벌어졌다. 짐승들까지도 선사의 열반을 예감하고 그 징조를 보여 주었던 것이다. 내장사 뒤쪽에 자리잡은 석란정에서 밤이면 호랑이가 울었다. 깊은 밤만 되면 이곳에 내려와 슬피 울고 가는데 이런 일이 몇 달이나 계속되었다. 이런 일이 계속되는 동안 며칠간은 갑자기 수많은 까마귀 떼들이 몰려와 내장사의 상공을 오랫동안 배회하다가 사라지곤 했다. 이것을 본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무슨 큰 징조인데 알 수 없는 일이라고 걱정을 했다. 다 부처님의 영험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선사는 자기가 죽는 날을 알고 있었다 한다. 오후에 돌아갔는데 그날 아침의 일이었다. 선사는 제자인 고벽(古碧)을 시켜 {오늘이 마침 정읍 장날이군. 얼른 정읍시장에 나가 무명베 4필, 짚신10켤래, 그외 상례(喪禮)에 필요한 물품을 알아서 사오도록 하게. 지금 당장 떠나게.}하는 것이었다. 고벽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스승의 부탁이므로 시행은 해야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사건을 예견한 모양인데 알 길이 없었다. 그리 급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고벽은 마침 비가 죽죽 내리고 있어 다음 장날이나 가려고 하고 있는데 선사의 독촉이 또 있었다. {아니, 얼른 떠나질 않고 무얼하고 있나. 지체 말고 시장을 다녀오게}하는 것이었다. 고벽이 장을 보러 떠난 후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선사는 손상좌인 다천(茶泉)을 불러 먹을 갈게하며 달마상을 그렸다. 그때 6장의 달마상을 그렸는데 평소에는 갈대타고 강을 건너는 절로도강(切路渡江)의 입상을 많이 그렸으나 그날은 좌상만을 그렸다고 한다. 그림을 다그린 백학명선사는 자리에 몸을 눕히고 제자인 운곡(雲谷)과 그외 불자들에게 원각경을 외우도록 하여 독경속에 미소를 지으면서 고요히 멸도(滅度)했다. 그때가 1929년 3월 27일 오후 2시였으니 수많은 불자들의 슬픔은 너무도 큰 것이었다. 고벽스님은 정읍장에서 사온 상례물품을 그대로 쓸 수 있었으니 백학명선사의 영감의 계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선사가 열반한 이후에 또 이적이 일어났다. 화장한 그의 몸속에서 70개의 백색 문양사리가 나왔으며 큰 고승에서만 볼 수 있는 영골까지 나왔으니 현세에 드문 불도정진의 결정체였다.

달마상 그리기를 즐겨했던 선사는 자신이 달마상을 닮았아는 말을 듣고 한번은 달마상의 자화자찬의 화제(畵題)에서 "사람들이 혹 나를 보고 달마와 흡사하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보니 별안간 스스로 참말인 듯 싶다."라고 자찬한 일화도 전한다. 또한 유고 작품으로 원적가(圓寂歌), 왕생가(往生歌), 신년가(新年歌), 망월가(望月歌), 해탈곡(解脫曲), 선원곡(禪園曲), 참선곡(參禪曲)등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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